​오징어(이)가 태어났다!  SQUID came out of its EGG!

《케렌시아 Querencia》

2022. 03. 16 - 04. 03

참여작가: 장자현, 이기찬, 유석근

공동기획: 상히읗, 이유진

중간자로 살아가기

 

하나. 인류는 자연이 만들어낸 보금자리에 깃들여 살아왔다. 개인의 안정과 휴식을 위해 자연에 개입하고, 또는 침범했다. 동물 역시 자신을 보호할 집을 지었다. 인류가 더 풍족한 보금자리를 가질수록, 동물은 대안적 경로를 탐색하게 되었다.

하나.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보금자리에 깃들여 살아왔다. 개인의 안정과 휴식을 위해 타 인간의 보금자리에 개입하고, 또는 침범했다. 밀려난 인간 역시 자신을 보호할 집을 지었다. 밀어낸 인간이 더 풍족한 보금자리를 가질수록, 밀려난 인간은 대안적 경로를 탐색하게 되었다.

하나. 많은 맹금류는 둥지와 사냥터 사이에 어떤 중립 지대를 갖는다. 이 지대에서는 새들이 먹이를 공격하지 않기에 비교적 힘이 약한 개체는 일부러 이곳에 제 새끼를 낳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도 한다.* 《케렌시아 Querencia**》는 3명의 작가와 3명의 기획자가 상정한 중립 지대로 작동한다. 이 지대에서는 동물이 인간에게 밀려나지 않으며, 인간이 인간에게 밀려나지 않는다.

장자현은 도자 작업을 하며 재료로 사용하기 이전의 흙이 동물의 집을 짓는 원료임을 떠올린다. 지금까지 동물의 집을 관찰하고 재현하여 밀려난 존재를 기억하고자 했다. 이제 그 재료로 인간의 집을 지어보는 것은 그들의 동류가 되기 위함이다. 이기찬의 작업에 등장하는 미조(迷鳥)는 떠나온 명분이 저마다 다르며, 적응하여 살아남거나 달라진 환경에 유명을 달리한다. 한편, 친환경 에너지를 얻고자 설치된 풍력 발전기에 수많은 새가 치여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을 접한 작가는 지금도 어디선가 날고 있을 모든 새의 안전한 비행을 바라본다. 유석근은 이동성을 가진 피사체를 찍는다. 사진 속 피사체는 다시 렌티큘라 화면에 반사되어 역동성이 배가된다. 이미지는 각도나 거리에 따라 선명도의 차이를 보이며, 이는 라이브 모듈레이션을 통해 산발적으로 변화하는 소리와 함께 출입 영역의 구분을 지운다. 상히읗은 두 명의 기획자가 만나 구성한 ‘상히읗’ 콜렉티브가 운영하는 전시 공간이다. 2021년 6월에 개관해 2022년 6월을 마지막으로 물리적 문을 닫는다. 주인의 존재가 점점 흐려지는 이곳에서 그들은 다음 중립 지대 혹은 진짜 ‘집’을 찾아 나설 준비를 한다.***

케렌시아는 공동의 영역이다. 어떤 출입도 통제되지 않으며, 원하는 만큼 머무르고 떠나도 좋다. 한편, 모두에게 열린 보금자리는 유일한 존재를 위한 영속적인 공간이 아니다. 이곳을 방문한 인간 그리고 비인간 존재들은 주어진 영역을 자유롭게 점유하는 동시에 불가항력적으로 떠남을 약속한다. 개입과 떠남의 경계는 케렌시아를 찾는 것이 아니라, 찾은 케렌시아를 쓰는 방법에 있을 것이다.

 

글—이유진

 

* 야콥 폰 윅스퀼,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b, 2012, p.97.

** ‘케렌시아(Querencia)’는 스페인어로 ‘애정, 애착, 귀소 본능, 안식처’ 등을 뜻하며, 투우 경기에서 투우사와의 싸움 중에 소가 잠시 쉬며 숨을 고르는 영역을 이른다. 경기장 안에 확실히 정해진 공간이 아닌, 경기 중 소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피난처로 삼은 지대로, 투우사는 케렌시아 안에 있는 소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 현대에는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번안하여 통용된다.

*** 상히읗에게 공간이란 비어있고 또 열려있다. 하나의 공간이라는 것이 그 물리적 형태를 차치하더라도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다. 무릇 공간이란 인간의 용도나 목적에 맞도록 지어지지만, 그 안에서 인간은 다양한 감정과 기억을 공유한다. 상히읗의 출발 지점도 그러했다. 공간의 크기나 모양새보다는 가변성에 중점을 두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경험—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형태이든—을 선사하고자 했다. 《케렌시아 Querencia》에서 작가들과 기획자들이 그려낸, 인간의 주관을 제한 중립 지대로서의 상히읗은 밀리지도 밀어내지도 않는 듯하다. 중립 지대를 여는 문에서 새들을 맞이하고, 매일 달라지는 사운드를 공명으로 받아내며 도자 벽돌을 지지하며 받쳐준다.

묵묵히 위치하는 공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듯 보이며, 이 가능성은 사실 서너 개의 벽 안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깨우쳤다. 전시를 준비하며 동요 ‘우리 집에 왜 왔니’ 가사가 문득문득 떠올랐다. 우리 집에 왜 왔냐고 물어보는 사람한테 너 잡으러 왔다고 하는 그 동요. —상히읗 주인장 왈